전에 필자는 추자도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가 몇 번 있었다. 신문 컬럼을 통하여 언급하기를 “제주 본토 사람이 추자도를 얕잡는다면 이는 육지 사람이 제주를 없이 여겼던 때를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흔히 추자도의 북쪽 바다를 육지바다라 하고 그 남쪽 바다를 제주바다라 한다. 추자도는 해상 교통의 중심축이며 아울러 국방·산업·관광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특히 인문환경에 대한 문제와 문화현상에 너무나 소홀히 하는 듯하게 보인다. 그림과 붓글씨에 뛰어난 추자도 출신 해주(海洲) 원용식(元容植, 1907~1957)은 더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선진지의 예술 수업에 몸을 바쳤다. 그뿐인가 동양화의 본류를 찾기 위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奉天)에서 피를 말리는 그림 수업에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은 호평을 내려 중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추자의 최영장군 사당에 쓴 ‘최영장군대장군신사(崔瑩大將軍神社)’라는 현판 글씨이다. 이는 1925년 처음 귀향하여 사당에 참배하러 갔다가 남긴 휘호(揮毫)와 내부 벽화이다. 이는 초기 작품이어서 비록 수작은 아니지만 그의 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화백은 후일 서울 정릉(貞陵)에 은거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기여, 산수화, 사군자, 화조화(花鳥畵)를 그렸고, 특히 잉어를 소재로 한 그림을 잘 그려 격조 높은 그림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잉어는 바로 추자도 섬 안에서 갇혀져서 외롭게 지냈던 자신의 자화상으로 여겼으리라.

 

현재 제주교육박물관 소장실 안에 간직한 동양화 ‘설경(雪景)’과 ‘흑매(黑梅)’라는 두 작품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는 제주교육박물관 개관에 앞서 필자가 추자중학교를 통하여 서울 사는 해주의 딸에게 선친이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한 추자도 최초의 인물이란 점에서 유작(遺作)을 희사하도록 하여 입수한 작품이다. 당시 강정은 교육감도 너무나 좋아해 교육감실 소장함에 보관했던 일도 어제인 듯하다.

 

당시 해주(海洲)의 집안은 모두 일제의 횡포에 저항한 흔적이 보인다. 원용덕(元容德, 1906~?, 일명 원용기)은 모슬포에 살면서 민중계몽으로 유명한 광선(光鮮)의 숙의 교사로, 도일하여 노동을 하면서 항일운동에 가담, 또 원용덕의 친형인 원용혁(元容赫, 1980-1950)은 기독교도로 야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가르쳤다. 아우 원용현(元容賢)은 1932년 5월 추자도 어민의 항일운동을 일으켰을 때 징역형을 받은 바 있었다.

 

1926년 실형을 받은 김종만, 김학련, 김후배, 조재오, 오사수, 황명채, 고이중 등은 추자어업조합에 저항한 인사들이다. 또 1932년 영흥리 김봉수(金奉守)가 주동으로 일으킨 것이다. 일제 당국은 그에게 1932년 7월에 징역 7월형을 선고, 동일 사건으로 김기형(金基馨), 이사문(李仕文), 추남수(秋南洙), 김득수(金得洙), 박천석(朴千石), 원일개(元一凱), 고일주(高日柱), 원용덕(元容賢), 박복순(朴福順), 고태욱(高泰旭), 추정수(秋丁洙) 등 11명은 1932년 7월 모두 6월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 제주지국의 민완 기자 홍순일(洪淳日)과 윤석원(尹錫沅)은 사실을 기사화하자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곧 1933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의 항일인사들은 심사 끝에 건국훈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장 등을 각각 받았다. 추자 항일인사들은 거리 관계로 혹은 몰라 신청 시기를 놓진 것이 아닌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하루속히 신청함이 어떨지! 이를 담당하는 제주보훈청에서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행정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