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열들은 민주공화제의 헌법을 얼마나 목말라 했기에 상하이(上海)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는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멀리 메아리쳐 이룩한 쾌거였다. 이래서 3·1절은 우리나라의 4대 국경절의 하나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은 만고의 진리였다.


1945년 조국은 해방되고 또 다시 만세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어 잠시 옥신각신하더니 1948년 7월 17일에 근대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였다. 8·15의 광복절에 이어 제헌의원들은 초대 의장 이승만(李承晩)박사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의사당 안에서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이는 5000년 만에 있었던 한민족이 갈구하던 지고지상(至高至上)의 절규였다. 이래서 광복절과 제헌절을 우리나라의 4대 국경절에 포함하는 이유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에 이 제헌절을 실제 경험했기에 남보다 다른 감회를 갖는다. 당시 나는 비록 어렸으나 민족주의에 경도되었던 탓이리라. 당시 사회주의 이상에 많이 경도하는 데도 그에 몰입하지 않았다. 이 헌법이 만들어질 때는 38선이 가로놓여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난 병신 몸이었다.


이남은 서울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헌법을, 이북은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헌법을 각기 만들어 2년 뒤에 남침으로 민족의 비극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보냈다. 얼마나 슬펐던가! 얼마나 울었던가!


당시 자유민주주의 헌법제정위원에 제주의 오용국 의원이 참여했다는 점에 나는 도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졌다. 그는 앞장서서 제주도(濟州島)를 도(道)로 승격시키고자 외친 제주의 은인이다. 나는 최근 당시의 국회 속기록을 보고서 그의 애향심에 너무나 감동했다.


당시 전라도 출신 국회의원들의 반대 발언을 무릅쓰고, 더구나 미 군정청에서 한 일이니 미제국주의(美帝國主義)에 동조해서야 되겠느냐는 좌익들, 특히 남로당(南勞黨)의 결사반대, 또 길도(道)로 승격하면 세금을 많이 내게된다는 유언비어 등 요동치는 분위기에 절대 굴하지 않았던 오 의원에게 경의를 표했던 일이 어제인 듯하다. 


한편 알아둘 일은 4·3 직후 몰래 숨어 월북한 제주 출신 김달삼(본명 이승진(李承晉)·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출신)이 김일성(金日成)에 의해 지명되어 북쪽 사회주의 헌법제정위원에 끼었다는 사실이다.


제주4·3사건의 혁명정신(?)을 높이 평가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이어 수령의 지시로 강동(江東)정치학원(원장 박병율(朴秉律))에 들어가 게릴라 특수교육을 받았다.


1970년대인가 생각되는데 박병율 원장이 김일성에 반기를 들고 소련으로 들어간 뒤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KBS에서 대담을 방영하는데 “게릴라 지도자 양성기관인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있을 때 김달삼을 가르쳤다”고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후일 종로 해장국집에 우연히 들렸더니 망명 전향한 박병율의 친필사인이 식당 안에 게시되어 있지 않는가! 남조선 혁명을 위하여 태백산 산맥을 타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편 오용국 의원은 6·25변란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평양으로 끌려갔다. 납북당한 다른 국회의원과 함께 위장 평화단체에 가입시켜 선전선동에 이용한다는 소식이 있을 뿐이다.


현행 헌법은 1980년대의 소산인데 내 기억으로는 당시 제주의 율사 현경대(玄敬大)의원이 헌법제정위원으로 맹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통일헌법을 제정할 때 역시 제주사람의 슬기로움을 알리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지도자와 선인들에 의하여 꾸준히 이어온 나라사랑·겨레사랑·고향사랑 정신을 이어 통일이 오면 ‘북의 태양절(太陽節)은 저래 가라’하고 통일절(統一節)을 5대 경축일로 삼아 모두 축배나 들자꾸나!
<제주도교육의정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