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제주도지사 업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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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동안 길의 혁명 물의 혁명 등 개발 마무리"
군인 도지사로서 무사히 업무 마친 것은 도민들의 도움 덕분
제주도민 소외감 극복하고 자긍심 세우는 데 노력한 것 보람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이 제주도를 방문해 나의 거취에 대한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

 

혁명정부에 참여했던 지방장관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인사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군으로 원대 복귀를 희망했고 박정희 의장 역시 내가 군으로 원대 복귀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박 의장은 내가 군으로 원대 복귀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내게 잘 생각했다고 흡족해했다.

 

나는 새로운 제3공화국 정부가 출범하는 12월 17일에 맞춰 12월 16일자로 해군으로 원대 복귀할 수 있었다.

 

내가 혁명정부 지방장관직을 가장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지사로 내가 박 의장과 호흡이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박 의장으로서는 제주도의 개발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도지사로 재임 중 추진해 놓은 일들이 많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처음 겪는 행정이지만 나로서는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던 만큼 여기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박 의장도 주위로부터 나를 서울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으나 나를 제주도 개발의 적임자로 생각하고 제주도를 위해 내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본다.

 

박 의장은 나 말고는 당장 뜻에 맞는 제주도지사 적임자가 없어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당시 도지사나 시장을 하다가 군에서 예편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혁명정부에서 서울시장, 경남지사, 부산시장, 강원지사, 경기도지사 등 거의가 민정이양을 하기 전에 군에서 예편해 행정부로 들어가거나 정치를 하거나 군으로 원대 복귀 했고 나만 유일하게 끝까지 도지사로 남아 있었다.

 

도지사로 마무리해야겠다는 나의 소신 말고도 박 의장의 배려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도민들은 내가 2년7개월여 동안 제주도지사로 일하는 동안 추진한 개발 사업들을 일컬어 ‘길의 혁명’, ‘물의 혁명’이라고 불러줬다.

 

5·16을 통해 들어선 혁명정부의 도지사로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 개통사업을 통해 도로개발을 이뤄낸 일과 심정 굴착을 통한 지하수 개발로 물 문제를 해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당시 제주도는 단 1m의 포장도로도 없는 자갈길이었고 수도가 없어 빗물이나 용천수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운명처럼 감수하고 있었다.

 

내가 도지사로 제주에 와서 본 도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문명세계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채 버려진 섬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 보물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의 심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욕, 다 함께 하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은 특별한 것이었다.

 

특히 교육에 대한 도민의 열망은 제주도의 발전 잠재력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도립대학으로 방치돼 있던 제주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승격시켜 제주발전의 인재들을 육성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혼란한 상황에서 벌어진 4·3사건의 아픔과 상처를 달래고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입은 상처를 달래는 일은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부인 혁명정부가 해야 할 몫이었다. 나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조상대대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타지에서, 거리에서 방황하던 4·3이재민들을 원주지로 돌려보내는 일을 박정희 의장과 함께 추진했다.

 

내가 제주도지사로 일할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큰 관심과 애를 쓴 일이 바로 4·3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이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3개년 사업으로 추진된 이 사업은 내가 지사로 재임한 2년간은 내가 직접 집행했고 1964년도 사업은 도지사직을 떠날 때 까지 계획을 세우고 예산까지 확보한 후 다음 지사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제주도 개발의 상징이자 시작점이 된 한라산 횡단도로(5·16도로) 포장 개통사업은 중산간도로의 개발, 일주도로의 포장으로 이어지고 제주도 발전의 동력이 됐다.

 

빗물과 용천수에 의존하던 물 문제를 해결한 지하수 개발은 이제 제주도의 생명수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조상대대로 물 허벅을 짊어지고 물을 길러 다녀야 했던 할머니들이 다시 딸에게로 또다시 손녀로 이어지던 고달픈 삶을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된 것은 정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 육지와 연결하는 항공과 해상교통수단의 확대, 관광산업과 감귤 등 특용작물로 농업생산체제 전환을 이뤄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제주도와 단절됐던 제주출신 재일동포와의 유대를 강화시킨 일이다. 제주도 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민간 자본의 투자를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이 나서서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이다.

 

4·3이후 본의 아니게 억울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조총련계에 속해 있던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이 자유롭게 고향을 방문하고 제주도 개발에 참여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재일동포들의 고향 제주도에 대한 사랑은 어느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관광호텔은 물론 학교, 전기, 도로, 감귤묘목, 교육기자재, 수도에 이르기까지 재일동포들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지사직에 있는 동안 제주도민들이 이같은 개발사업을 통해 스스로 소외감을 극복하고 자긍심을 세우는데 함께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내가 해군으로 원대 복귀 명령에 맞춰 다음 도지사 인사에 대한 도민들 사이에 관심이 높아져 갔고 후임 지사로 많은 사람들이 거론되기도 했다.

 

나는 12월 16일자로 이임하기로 결정된 것을 사흘 전에 통보 받자 이임 준비를 지시했고 1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은 재일동포와 제주도 유지 100여 명과 함께 서울로 갔다.

 

후임 지사는 대통령 취임식이 이틀 지난 12월 19일에 강우준 제주신문사장으로 결정됐다.

 

나는 12월 19일에 재일동포 모국방문단과 함께 제주로 내려와서 이임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회견에서 “지난 2년 반의 군정기간 중 현역 군인 도지사로서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도민 여러분의 협조 덕분이었다. 신임 지사에게 계속 협조하는 것만이 내가 못 다한 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민들이 나와 내 가족을 제주도민처럼 대해준 것은 정말 고맙다. 나와 아내 그리고 5명의 아들 딸 등 7명은 제주도민으로 포함시켜달라. 나는 재임 동안 제주와 너무 많은 정이 들었다. 내가 제주도민을 몰라보고 지나가더라도 꼭 제주도 사람이라고 알려줘 실수하지 않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인 12월 20일 제주관광호텔에서 이임식을 갖고 “부임 후 오늘까지 큰 과오 없이 도정을 수행하게 해준 제주도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떠나는 곳이 제주라던데 정말인 것 같다”고 전했다.

 

당시 나는 이제 떠나는 구나 하는 마음에 울컥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제주도를 떠나기 전에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임 인사를 했는데 내가 이임하는 소식을 전해들은 재일동포들은 내게 전별금을 전달하자 나는 그 것을 양로원으로 보냈다.

 

내가 도민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내 가족과 함께 정든 제주도를 완전히 떠난 것은 해군으로 원대 복귀 명령이 떨어진 지 10일 정도가 지난 성탄절인 1963년 12월 25일이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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