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는 동맹고강(東盟古疆)의 만주 땅과 한반도로 이루어지고, 제주 섬은 한라산을 영산으로 하여 탐라라는 강역(疆域)을 이루었다.

 

그런 역사가 흘러 한반도와 제주는 영해(瀛海)라는 바다로 갈라져 있고, 제주 사람들은 말과 풍습이 독특하고 달라 육지와 견주며 ‘육지 사람은 이렇고 육지는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고려사>에 영남(嶺南)이나 호남(湖南)이니 하는 지역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름이 언제부터 널리 통용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용한 것만은 확실하다. 흔히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500리 이내의 땅은 경기(京畿)지방이라 하고, 철영관(鐵嶺關) 서쪽 평안도를 관서(關西)지방, 철영관 북쪽을 관북(關北)지방이라고 하고 한다.

 

한때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4ㆍ3사건을 진압하러 들어와 무장대 진압에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민폐도 많아 서북 사람이라고 하면 제주 토박이는 이를 간다. 그래서 함경도 사람들은 ‘서북’이란 평안도 지방이고 서북지방이 아님을 강조한다. 당시 서북청년단의 핵심인물은 모두 평안남도 출신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황해(黃海) 서쪽에 있는 황해도를 해서(海西)지방이라 하고, 경기 동쪽지역 곧 대관령 동쪽을 관동(關東)지방이라 하여 강원도를 지칭하며 보다 더 대관령 서쪽인 관서(關西)지방까지를 포용한다. 그리고 조령(鳥嶺)ㆍ죽령(竹嶺) 이남을 영남(嶺南)지방이라 한다.

 

그러면 호남은 어떤 곳인가. 분명히 밝힌 사전이 오늘날 하나도 없다. 국책사업으로 펴낸 사전에도 ‘금강 이남을 호남, 금강 이서를 호서지방이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강남’ 혹은 ‘강서’ 지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호남(湖南)은 호수에서 찾아야 한다. 김제평야에는 세 개의 호수가 있는데 익산의 ‘황등제호(黃登提湖)’, 김제의 ‘벽골제호(碧骨提湖)’, 고부의 ‘눌제호(訥提湖)’ 등을 말한다.

 

조선시대 전주 출신으로 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 16권 ‘지리전고’에 따르면 “벽골제호를 경계로 하여 이 호수의 남쪽을 호남지방으로, 호수의 서쪽 충청도를 호서지방이라 한다”고 한 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율곡(栗谷)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을 기호(畿湖)학파라고 하는데 이때의 기호는 경기도의 기(畿)자와 호서(湖西)의 호(湖)자를 지칭하지 호남은 끼지 않는다. 왜 호남이 끼지 않았는지 하는 설명은 장황할 듯하여 이를 줄인다. 비록 중국에서 모방하여 불러진 지명이지만, 앞의 설명에서나마 지역 명칭을 대략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벽골제호란 오랜 옛날부터 관개용 수리시설이라 할까. 둑을 쌓아 물을 막아 논농사를 하던 호수였다. 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관광한다던 나그네들이여! 오늘날 이곳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퍽 드물 것이다.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 곳이어서 2~30여년 전에 찾아가 본적이 있다. 호수라 하기에는 역부족이요, 그저 저수지라 한들 틀리지 않겠다고 혼자 희미하게나마 중얼거려 본 기억이 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주는 독자성을 잃고 점점 작아져서 전라남도에 속하는 제주목ㆍ정의현ㆍ대정현 등 삼읍(三邑)체제였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는 전남의 1개 군에 불과해 무시를 당했던 것이다. 조국이 광복되어 미군정청에 의해서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되니 전라남도와 어깨를 겨루자 시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남로당과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에서는 승격되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이유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작품이란 점과 도 승격에 따라 주민의 부담이 막중하다는 것이었다. 호수의 남쪽이 아니요, 더구나 먼 바다 곧 대양을 품어 안은 제주특별자치도란 데서 큰 바다 영(瀛)자의 남쪽이니 영남(嶺南)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