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고향이 있고 고향은 어머님의 젖가슴처럼 따스하고 포근하다. 서울에 산다고 뽐내지만 어찌 서울을 고향이라 하겠나! 하기야 모처럼 해마다 찾아오는 추억이지만 올해의 한가위는 무척이나 센치멘탈로 깊숙이 젖어들게 한다. 그렇다! 70대를 마감하게 되어 지난 세월을 반추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지난 여름철은 무척이나 무덥던지 개구쟁이 시절 뛰놀던 ‘진-모살’ 모래판을 찾았다.

 

10여 명이던 코 흘리기 동창생은 다 어데 갔노. 오직 바닷가에 살던 벗 하나만 남아 나를 쓸쓸하게 했다. 해방된 감격에 민초들이 힘을 쏟아 세운 초등학교는 폐교의 위기라 하니 더욱 나를 슬프게 한다.

 

애월읍에 당시 살던 두 선비의  한시나 감상하며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보려 한다.

 

첫째는 해방의 감격시, 애월면 유수암리의 선비 강희경(姜熙慶)은 이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題 聞自由解放 “乙酉之年乙酉月 忽聞志士建朝鮮 檀箕日月回生色 麗李江山相繼傳 今古忠賢名萬世 莊重節義續千年 然而又入西洋手 有志紳人仰聖天”(제목, 자유해방된 소식을 듣고 ; 을유년 을유월에/ 애국지사로부터 건국이란 말 들었네/ 단군과 기자는 해와 달처럼 회생했도다./ 고려.조선으로 강산을 이어지고/ 이제나 예나 충성심은 만세에 길이 남아/ 장중한 절개와 의리는 천만년 빛나!/ 또다시 서양의 손아귀에 들어나 갈지/ 유지 신사들은 성스러운 하늘에 맹세하거나./  사필자는 말하기를 “이 시의 전구(轉句)의 내용을 음미하건데 서양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내용은 예언적인 것으로 보아진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힘의 미치는 것에 두려움과 건국에 대한 희망의 교차하며 새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졌으리라. 참으로 우리를 감격시킨 한시였다.”라고.

 

둘째는 곽금교 증축 백일장에서의 훈학시다. 해방의 기쁨으로 학교 터전을 희사하자 1946년 곽지ㆍ금성리 합동으로 곽금국민학교를 설립하였다. 1948년 4교실을 완성하고, 기성회장 장권아(張權兒), 학부형회장 김화룡(金化龍), 제3대 박치선(朴致善)교장이 부임하여 교실 증축에 박차를 가해 완성한 뒤 1950년 10월 제1회 가을 대운동회를 겸하여 당시 곽지리장 김정언(金廷彦)을 중심으로 한시 백일장을 열어 제주 영주음사(瀛洲吟社) 사장 최원순(崔元淳; 전 제주지방법원장)에 의뢰하여 도내의 시인묵객에게 기고하게 하였으며 고시관에게 사정까지 의뢰한 바 있었다. 당시 제주 성안 시인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청봉(晴峰) 박우상(朴雨相), 곽지에 온 피난민 죽재(竹齋) 김재하(金在河) 등과 제주읍, 애월면, 한림면 등지에서 많이 응모하였다. 최우수작에 일헌(一軒) 장성흠(張聖欽; 곽지), 차석에 김재하(金在河; 서울에서 곽지에 피난을 온 한학자)가 차지하였다. 이로써 당시 곽지 마을이 문촌이라 하는 말은 널리 알려졌다.

 

최우수작은 다음과 같다. ‘三山西畔鼎川東 一室經營兩里同  習習鳥飛如進學 ??燕語賀竣工 艸生書帶庭交翠 花發文明日映紅 萬里進程從此始 偉奇男子在門中’ “곽오름 서쪽, 정짓내 동쪽/ 두 마을 함께 교실증축 했네./ 날아드는 새들이 습습 소리 내듯 배우고./ 남남 제비떼처럼 준공식을 축하하오./ 어린이는 책을 끼어 뜰에서 어울리고,/ 문명세계 꽃피듯 해 돋듯/ 만리로 뻗어 나갈 길이 이곳에서 일어나/ 훌륭하고 기특한 사내들이 이 문 안에 있도다./  이 준공식 때 독지가들에 대한 공덕비를 세워 기렸다. 김재천(金在天; 대학총장 김선종 증조부), 김재행金在行; 김성완 조부) 등 교지 희사자, 또 재외곽지향우회 공로비, 학교기성 공로비, 장성흠(張聖欽; 재경 장인식사장 조부), 김응삼(金應三; 김종율 조부), 진이호(秦利好; 교장 진덕부 조부), 좌임관左任琯; 교장 좌동일 조부), 조행숙(趙行淑; 재일교포), 좌창선(左昌善; 4?3당시 학교방화 저지한 공로) 등이다.

 

얼마나 멋있는 문화행사를 가졌던가! 우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오늘의 화사한 문화제(文化祭)에 미치지 못하다고 하겠지만 순수한 감격과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한 점은 보다 진일보한 행사였다.